벌써 12월입니다. 이때 쯤 되면 누구나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걸어온 지난 일년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난 해를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인상들은 우리를 흥분케하기도 하고 또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게 하기도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통전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데 그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만 집착하지 않고 지나치게 현실적이지도 않으며 무모한 공상에 사로잡히지는 말아야겠다 싶습니다. 대신에 과거에 대한 기억(memory), 현재와의 공감(empathy), 그리고 미래에의 상상(imagination)이 조화롭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과 사고의 깊이를 더하여 자신만을 향했던 이기적인 마음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한 순례의 길에서 외롭지 않는 굳굳한 희망을 우리 가슴속에 품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그의 책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에서 말하기를 정신과 삶을 옳게 연동하여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창조적인 사람들은 가상의 막연한 기대로만 여겨져왔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Noch-Nicht-Gewordene)을 이 세계의 최전선에서 맛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전선(Front)에 서 있는 프론티어(Frontier)들의 애끓는 용기를 찬양하며 희망 가득한 세상을 희구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세인들의 무지몽매와 왜곡 속에서도, 그리고 잇따른 죽음의 고난과 핍박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마 11:12)임을 알고 행하셨던 그분 예수의 모습에서 보아왔던 것입니다. 프론티어 예수께서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지만 영을 삼킬 듯 다가오는 울분과 죽음에의 공포와 맞서 싸우는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영에 취한 그 분(Him)의 모습을 인류에게 보여주신 예수는 진정 과거-현재-미래가 단순한 직렬적 흐름이 아닌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돌아본다는 것은 희망입니다. 돌아볼 줄 안다는 것은 성령안에서의 평안과 희락(um den Frieden und um die Freude)을 체감하며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눈입니다. 지금,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별스런 통찰이나 직관이 아니라 우리 삶에 내재된 세심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인 박노해가 노래했듯이 큰 것을 잃어버렸으나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고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흙과 뿌리를 보살펴야하며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않을 수 있는 그런 희망 말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희망이 희망이 아닌 것을 깨달으며(롬 8:24) 하나님으로 인한 제1의 질서 안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용기를 요구할 것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이때, 태양력으로 한해의 마지막 12월이지만 대강절로 교회력이 다시 출발하는 이 때, 끝과 시작 그리고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교차하는 12월에 우리를 감싸고 있는 시간에 흠뻑 젖어 봅니다. 2000여년 전 시간속에 들어오셨던 예수, 이 사건을 유한속에 무한이 들어온 역설의 사건이라 찬양했던 키에르케골의 마음에 젖어봅니다.

세상엔 폭압적 전쟁의 공포가 여전하고, 다국적 기업들의 침투로 약소국들은 세계화의 늪에서 허덕이며, 아이들의 동심은 흙이 아닌 아스팔트 위와 난잡한 미디어 속에 감금당해 버린지 오래지만, 그리고 가진자만이 더욱 자유로운 땅이라는 정태춘의 노랫가사가 비단 80년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더더욱 그러할 것임을 알고 있지만, 아직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낙담하지 말고 담대하라 말씀하신 그분의 탄생이 이제 곧 다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끝이지만 끝이 아니랍니다. 죽음의 십자가였지만 모든 사람을 살리는 부활이었듯이 말입니다. 절망은 단지 절망일뿐 희망을 어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희망합니다. 고로 존재합니다.

찬미예수!  대강절에

임태일(고사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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