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실천시민행동 대표로 있는 김승무씨(39)는 독특한 사람이다. 사회운동에 대해 보수적 입장을 견지해온 예장고신 출신으로, 또 지금도 고신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지난 1991년부터 이른바 사회선교 활동에 몰두해왔다는 그의 이력이 그러하다.

▲ 인권실천시민행동 대표 김승무 집사. ⓒ뉴스앤조이 최재호
노동운동과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비롯해 1990년대 후반부터 노숙자복지와 인권 문제에 대해 집중해온 그가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교회개혁을 위한 교회개혁지원센터 일을 겸하여 왔다는 사실도 이채롭기만 하다.

김 대표를 비롯해 모든 상근 간사들은, '집행기구의 간사는 학생신앙운동(SFC) 강령에 동의하는 자로서 이 사역에 평생을 헌신할 것을 다짐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는 집행위원회 내규에 동의한 자들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시민운동 단체에서의 활동을 하나의 징검다리처럼 여기는 많은 우리 시대 시민운동가들과는 분명히 다른 단체며 인적 구성이다. 이 단체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들어온다는 점에서 한번 간사는 영원한 간사다.
 
평생을 헌신할 각오로 뭉쳐진 이들은 현재 노숙자들의 복지와 인권 향상을 위한 사업을 하는 '홈리스지원센터', 비정규직 상담과 노동관련 교육을 실시하는 '비정규직상담센터', 교회 바로세우기 운동을 전개하는 '교회개혁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금년 1월부터는 재소자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무연고재소자 방문, 상담과 영치금 지원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개혁신앙 강령동의와 평생을 사회적 약자들 위해 헌신할 서약으로 선발되는 간사들. ⓒ뉴스앤조이 최재호
김승무 대표는 "인권실천시민행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이념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받는 편견과 소외를 해소하여 자유와 정의, 인권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다. 우리는 어떤 일이라도 소외 계층을 위해 활동할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고 또 할 수 있는 사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사역의 방향을 소개하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이어서 김 대표는 사역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비교적 담담히 설명해 나갔지만 그 세월의 골짜기에 묻은 그의 눈물과 고민과 주변으로부터 받았을 냉대와 의혹의 눈초리는 고스란히 기자에게 전달되었다.

보수 교단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왔던 김 대표는 군생활 도중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시골 교회를 돌며 성경학교를 열도록 도와주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대학 생활을 보냈던 그였지만 깊은 고민을 하던 그는 자신의 신앙이 잘못됐다는 결론을 얻게 됐다고 한다. 그는 많은 고민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소외받고 버림받은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발견하고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는 신앙인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하기에 이른다.
 
1991년 군 제대 후 김 대표는 노동운동과 노동선교를 위해 대구지역에 있는 성서공단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 문제를 위해 이른바 '위장취업'과 해고를 거듭하며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따라 활동했다. 또 외환위기 즈음해서는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홈리스 사역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지역 교회에서 상처받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공부도 병행하게 됐다.

그러던 2002년 월드컵 열기로 전국이 뜨겁던 어느 날 김 대표는 박수미, 권용현씨 등과 함께 '인권실천시민행동'을 결성하고 대구역 주변의 사무실을 얻어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다들 월드컵 4강 신화에 들떠있을 때, 이들 세 사람은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는 낮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김 대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004년 9월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월 15만 원씩의 생활비로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

김 대표는 당시를 "그때는 15만 원의 생활비도 집으로 못 가져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기본적인 생계 유지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교회와 사회의 편견이었다. 특히 내가 속한 교회에서는 선교나 전도하는 일을 하지 왜 노동운동이니 노숙자 지원이니 하는 일들을 하느냐며 혀를 찼다"라고 회고했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하면 살림살이가 많이 나아졌다. 교회의 아픔을 겪으며 그와 상담하고 연대해갔던 지역 교회와 학생신앙운동을 하던 후배들 1백여 명이 이곳으로 그들의 급여중 상당액을 기부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후원으로 윤택한 수준은 아니지만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서약하고 들어온 상근간사들에게 30년간 월 1백만 원 가량의 지원을 해 줄 수 있게 됐다. 여기에 철도 공무원으로 순직한 김 대표 동생의 국가보상금도 전액 이곳에서의 활동을 위해 보내졌다. 이 일에 김 대표의 부모님도 흔쾌히 동의했다.

이러한 여건 개선은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으로 연결됐다. 현재 노숙자들은 누구든지 무료로 이곳 사무실에서 급식과 세탁, 목욕, 휴식 등의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됐다. 또 각종 민원 업무도 대행해주고 국가로부터 지급되는 주거지원비로 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 지역에 있지만 서울에 있는 노숙관련단체(노숙자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에도 월 1백만 원씩 지원하고 있다.

"이 일은 마땅히 우리 시대 교회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가장 보람있는 일은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외면당하던 사람들이 여러가지 면, 특히 복지 면에서 개선되는 것은 물론 복음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신앙인으로 세워져 가고 변화되어가는 것을 볼 때 이 일에 헌신한 보람을 느낀다."
 
(문의·후원: 인권실천시민행동 053-742-0352,3 www.peopleact.or.kr)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