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목련, 철쭉이
셋방살이 들이려 가지마다
낡은 집터 고치는 손길 분주하다
새순 피우는 산고에 산파노릇 해달라며
바람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나목
겨우내 묻어 두었던 목숨
한 때의 생을 나이테에 키우기 위해
가슴 졸이며 낳는 봄은
나목의 자식이고 보람이지
그래, 봄은 겨울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앓다가 끝내 벌어진 골반에서
하얀 백지에 새겨
'앓다'가 아름답다'가 됨을 알리고
앞뜰에 화단을 보아
벚꽃들 발 아래 자결하고
냉이, 민들레, 진달래, 앳된
울음 듣는다.
나는, 산고 겪는 나목의 소리를.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나목'이라는 시다. 나목의 뜻은 잎이 다 떨어져 가지만 있는 나무 즉, '벌거벗은 나무'란 뜻이다. 상록수를 제외한 잎을 떨어내는 겨울나무를 말한다. 겨울을 나기 위해 자기를 수식하던 화려한 수사를 다 벗어버리고 오래 인내하고, 침묵하는 나무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봄을 품고 있는 나무, 안으로 침잠하고 내면에 차가운 정열을 품고 있는 것, 침묵 가운데 고독하지만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 생명을 안으로 숨기고 있는 나무다.

▲ 박수근의 그림 '두 여인'

내가 나목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십수 년 전이다. 하루 온종일 직장에서 일하고 어두워졌을 때에야 퇴근하는데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면 한참을 회사에서 걸어 내려와야 했다.

피곤한 몸으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는데 가로수들이 일제히 벌거벗은 몸으로 하늘을 향해 기원하는 듯 팔을 뻗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잉크를 풀어놓은 듯 밤하늘은 푸르스름한데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허공을 배경으로 팔을 뻗고 있었다. 허공에 걸린 나뭇가지 사이에 창백한 달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늘을 향한 나무들의 기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나뭇가지 사이를 배경으로 펼쳐진 밤하늘과 달빛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목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하루의 고단함이 씻겨 나가는 듯했다. 길을 가다가 문득 문득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버릇은 아마 그때부터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나무들의 기도가 오히려 겨울에 더 뜨겁게 열린다는 것을 그때 알았을 것이다.

▲ <박수근> 시공아트 28 펴냄 / 232쪽 / 15,000원

<박수근>(오광수 지음/시공아트)을 만났다. 박수근을 통해 나목을 만났다. 나목을 만나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박완서의 <나목>을 다시 추억할 수 있었다.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목>은 소설가가 되고 싶어 열병을 앓고 있을 때 만났던 소설이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어 40세의 늦깎이로 등단한 작가였기에 더욱 기억이 선명하다.

박완서의 <나목>은 6·25 동란을 배경으로 하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6·25를 겪으면서 불행을 경험했던 그 시대의 암담하고 불행한 삶을 그리고 있지만 그 암담한 시대를 잘 관통해 내고 소녀에서 한 여자로, 아니 한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그리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완서의 장편 <나목>을 먼저 얘기하는 이유는 바로, 박완서의 소설에 박수근이 등장하기 때문이며, 나목이 갖는 공통점 때문이다. 박완서의 장편 소설 <나목>의 소재가 된 것이 바로 박수근 화백과 그의 그림 '나무와 두 여인'이었다. 박완서의 소설 속에 '옥희도'라는 이름으로 그려진 남자가 '박수근'인 것이다.

박완서씨가 6·25 당시 서울 신세계 미군피엑스 초상화 가게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박수근은 생계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뒤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고 한다. 박완서의 '나목'은 6·25 동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등장인물을 나목에 비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완서는 박수근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무들의 기다림  

"처음 내가 일한 곳은 요란한 수를 놓은 가운이나 파자마를 파는 매장이었는데 한 달도 안 되어 같은 업주가 경영하는 초상화부로 가게 되었다. 초상화부에서는 다섯 명 정도의 궁기가 절절 흐르는 중년 남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업주는 그들을 훗두루 간판장이들이라고 얕잡고 있었다. 전쟁 전엔 극장 간판을 그리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박수근 화백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딴 간판장이와 다른 점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염색한 미군 작업복은 매우 낡고 몸집에 비해 비좁았고 말이 없는 편이었다…

나에겐 전혀 맞지 않는 일이어서 그림 주문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업주가 뭐라기 전에 화가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월급제였지만 그들은 작업량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씩 그림 삯을 타 가게 되어 있었다… 화가들이 나에게 갖은 불평을 다할 때도 그는 거의 동조하는 일이 없었다. 남보다 몸집은 크지만 무진 착해 보여서 소 같은 인상이었다. 착하고 말 수가 적은 사람이 자칫하면 어리석어 보이기가 십상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박수근의 생활과 성품이 어떠했는지를 그려 볼 수 있는 글이다. 박완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박수근과 가까워진 계기가 있었는데 그 대목은 이렇다.

"어느 날 그가 화집을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출근을 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집 낀다고 간판장이가 화가가 될 줄 아냐' 하고 비웃었다. 순전히 폼으로만 화집을 끼고 나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화집을 펴 들고 나에게로 왔다. 얼굴에 띤 망설이는 듯 수줍은 듯한 미소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마치 선생님에게 칭찬 받기를 갈망하는 국민학교 학생처럼 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에서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비로소 내가 막돼 가는 모습을 그가 얼마나 연민에 찬 시선으로 지켜보아주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 후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나무들이 많다. 그것들은 거의 다 나목들이다. <귀로> <나무> <나무밑> <산> <판자촌> <골목안> <마을풍경> <들길> <나무와 두 여인> <봄이오다> <꽃피는 시절> <길> <고목과 행인> <나무와 사람들> <나무가 있는 언덕과 여인> 등 그리고 나무와 곁들여져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은 정면으로 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별로 없다. 측면 아니면 뒷모습이다. 돌아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나목 아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네나, 등을 보이며 앉아 있는 그림 속의 사람들. 그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인생의 봄, 그림의 봄을 기다렸을까.

나무와 같은 삶을 산 박수근

박수근은 1914년에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했다. 그는 보통학교에서 그림을 배운 것 외에는 특별히 누구의 사사를 받은 적 없이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다. 초등학교 교육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는 그림을 좋아하고 소질이 있었지만 그가 일평생 그림을 그리며 생을 영위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바로 밀레의 '만종'을 대하고부터였다고 전한다. 그가 본 밀레의 만종은 복사판이었다. 그는 만종을 보고 나서 "하나님, 이담에 커서 저도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의 예술적 특성은 소재와 기법에서 볼 수 있는데 그가 다루었던 소재의 범주는 인물, 풍경, 정물이란 모티브 위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1954년 국전에서도 '풍경' '절구'가 입선,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제작 생활에 들어가게 되는데 유일한 직장이었던 미군 피엑스를 그만두고 작품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박수근은 그림을 팔아 생활을 영위했던 최초의 전업 작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림이 상품화 될 수 없었던 그 암담한 시절에 그림으로 생활을 영위하려고 했던 만큼 생활은 고달프고 힘들었을 것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면서도 국전이나 대한미협회 등에 빠짐없이 작품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미술학교를 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주로 그린 대상이란, 자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게다가 가난했기에 그림에 풍부한 채색을 입히지 못했던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수근의 데생은 거의 연필로 그려졌다고 하는데 그의 장녀 박인숙의 회고를 보면 그의 삶이 얼마나 곤궁했는지 엿볼 수 있다.

"아버지의 화구 상자에는 몽당연필이 있었습니다. 그 연필들은 내가 쓰다 버린 것들이었어요. 그것을 주워서 뒤에 깍지를 껴서 대추씨만 해질 때까지 아껴 쓰셨어요. 지금도 아버지의 스케치가 남아있는데 그것이 모두 내가 쓰다 버린 연필로 그리신 것입니다. 화가용 4B연필이 아니라 내가 공부할 때 흔히 쓰던 연필이었어요."

후에 백내장으로 고생했으나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해 한쪽 눈을 실명했고, 남은 한쪽 눈마저도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실명 위기에 처하자 박수근은 현실에 대한 불만과 가족 부양의 무거움, 그로 인한 폭주로 신장과 간염에 병이 생겼고, 종내에는 간경화로 생을 마감했다.

박수근은 일평생 그의 가난한 이웃을 모델로 그렸으며 서민의 삶을 화폭에 담아내려 했다. 그는 현실에 반항하지 않고 순응하며 자기의 삶에 충실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그 안에서 꿈을 실현해 나간 사람이다. 살아있을 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그는 오히려 사후에 뜨겁게 조명 받는 작가다. '나목' 은 지금 한창 물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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