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여대 친일청산 기자회견이 3월 25일 12시 김활란 동상앞에서 열렸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민주노동당 이화여대 학생위원회(위원장 정유진)는 '친일 청산을 위한 이화인 모임'을 결성하고 3월 25일 12시 이화여대 김활란(이화여대 초대 총장) 동상 앞에서 김활란 동상을 철거할 것을 학교당국에 요구했다.

정유진 위원장은 김활란 동상을 철거하고 김활란의 세례명을 본 딴 '헬렌관'의 명칭을 개정할 것을 학교 당국에 촉구했다. 또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주관하는 '김활란 여성 지도자상'을 폐지하고 '김활란 여성 지도자상' 수상자들에게 수상 거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힐 것을 요구했다.

정 위원장은 또 김활란의 구체적 친일 행적을 발표했다. 그는 "김활란이 42년 12월 신시대라는 잡지에 '징병제와 여성의 각오'라는 글을 기고함으로써 자신이 열렬한 친일파임을 과시했다"고 말했다.

▲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만든 학생수첩. ⓒ뉴스앤조이 김동언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제작한 학생수첩에 김활란이 '이화인의 뿌리'로 올라와 있는 문제도 지적됐다. 정 위원장은 "김활란의 친일행적에 대한 37대 총학생회의 입장을 듣고자 했지만 답을 얻을 수 없었다"면서 "이화의 자랑스런 선배는 친일파 김활란 총장이 아닌 독립운동에 헌신한 유관순 의사가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한편 고려대 서울대를 포함한 몇몇 학교의 학생들이 김성수(고려대 설립자) 백낙준(연세대 초대총장) 장발(서울대 초대 미대학장)등 학내 상징적 인물의 동상철거를 요구하는 등 친일청산의지를 밝히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김활란의 친일행적]

다음은 민주노동당 이대 학생위원회가 발표한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총장의 구체적 친일 발언이다.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 -내선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 (동양지광, 1939. 6월) : … 과거 조선의 부인운동은 어쨌든 화려한 시기가 있긴 있었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로 구호에 불과한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내선일체의 대업 속에서 정말로 확고하게 현실성이 있는 부인운동이 전개되어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무장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 결성식 부민관 대강당 1941.12.27)
: … 저 흑노(黑奴) 해방(노예해방)의 싸움을 성전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은 정말로 내려진 것이다. 동아 10억의 민족을 해방하고 광명으로 인도 하려는 도의의 전쟁이다. 우리 총후의 반도여성은 지금 이 도의 전쟁에 한사람의 투사로서 가담하고 있다는 광영(光榮)을 가졌다.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년 12월 이화여전 교장 ) : …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중략)…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거룩한 대화혼을 명심 -적 결멸에 일로매진 ( 1943년 8월 7일 매일신보 논문 ) : … 이 기회에 대동아 건설을 위하여 동아 10억의 민족을 저 앵글로색슨의 손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우리 황군이 도의의 싸움을 하고 있는 이 때에 반도 청년에 이러한 영예를 내리옵심은 더욱 기쁜 바이며, 또한 행복된 일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배속으로부터 대화혼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존엄하옵신 황실을 받들어 모시고 생사를 초월하여 대군을 위하여 순국 봉사하는 그 마음 오직 우리 황국신민만이 특히 제국 군인만이 경험할 수 있는 바이다.

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년 12월) : …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 제군은 오늘 이때를 영구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가라! 전선으로 그 뒤는 우리가 맡겠다. 총후의 여성들은 제군들이 안심할 만큼 만사를 해내일 각오가 굳은 바이니, 바라건대 모쪼록 빛나는 전공을 세워 조선학도의 참다운 일면을 길이 청사에 빛내여라! …

남자에 지지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매일신보, 1943.12.25) : 1943년 12월 전시교육임시조치령에 따라, 이화여자전문학교를 폐교하고 '여자특별연성소'라는 농촌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뀐 것에 대하여 매일신보에 발표한 글…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

감격과 가중한 책임 - 진두에 나설 여학생의 결의 (매일신보, 1938년 6월 9일자) : 1938년 6월 당시 조선YWCA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라며 일본YWCA에 가맹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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