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말은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의사전달 수단입니다. 말은 우리의 감정을 교감할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타인과 정보를 교류하는 수단으로도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현대는 PR시대라고도 합니다. 자기홍보의 극대화를 위한 매체가 발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잘 하기 위해 웅변도 배우고 스피치도 배우고 강연기법도 배우는 세상입니다. 방송설교에 신경을 쓰기도 합니다. 목회자들은 설교를 잘 하기 위해 설교학을 공부하고 설교를 연습하기도 합니다.

변호사 같이 말 잘한다?

사회 직업 중에는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변호사입니다. 보통 말 잘하는 사람을 일러 그 사람 변호사 같이 말을 잘한다고 합니다. 변호사는 법전을 바탕으로 원고든 피고든 무죄를 주장하거나 자기가 수임한 사건을 유리하게 판결받기 위해 재판관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여 자기의 주장하는 바를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여기는 윤리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은 따지지 않습니다.

판사의 법리적 판단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변호사는 상당한 법적 지식과 언변이 필요합니다. 변호사가 얼마나 말을 잘 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기 때문입니다. 즉 유죄냐 무죄냐의 기로에 선다는 겁니다. 그래서 변호사들의 수입은 우리 사회의 최상위층의 소득계층이므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고 결혼상대자로 상위순위에 속합니다.

그러나 변호사들의 사적생활을 보면 공인의 도덕적 규범이 뒷받침되기보다는 그렇지 않는 즉 법대로 살지 않는 탈법적인 행위를 하는 변호사도 있는 것을 매스컴의 보도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탈세라든지 불륜, 사건 정보 누출, 사기 등의 비윤리적인 생활의 모습을 간간히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변호사임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일부 변호사들은 인권과 무료 변론, 빈민사회운동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판사나 검사, 변호사 세계는 법대로 살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법조계 주위에 '전관예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법조문대로 판결하기보다는 인간관계에 따라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법조계의 비리가 싹튼다고 봅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기에 이만 줄입니다.

정치인과 약장사 

그 다음 말 잘하는 사람은 정치인들입니다. 선거유세에서도 그렇고 대정부질의에서도 보면 말 못해서 죽은 사람 없을 정도로 청산유수와 같습니다. 선거에 출마하기 전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책을 출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000출판기념회 행사를 하게 됨을 봅니다. 그 책의 내용은 그런대로 다 좋은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쓴 대로 정치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점에서 정치인들이 써 놓은 책들은 관심 밖입니다. 그저 준다 해도 보지 않을 책들입니다. 읽을 만한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전형적인 계층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치인들이 모인 국회의 모습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말 잘하는 사람들은 약장사입니다. 옛날에는 5일장에 북 두드리고 나팔 불면서 하는 약장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할머니를 고객으로 하는 약장사와 치료기구를 파는 약장사들이 상가 지하에 차려 놓고 각종 무료상품들을 미끼로 돈을 벌려는 약장사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귀가 얇은 할머니들을 즐겁게 해주고 건강에 만병통치라는 말을 하여서 결국 할머니들이 치료기구나 약을 사게 만듭니다.

합리적 판단력이 결여된 할머니들이 약을 사놓고서는 며느리와 아들과의 갈등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효도 차원에서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장사들은 약과 의료 기구를 잘 팔기 위해서는 미사여구의 말을 하게 됩니다. 그 말 속에는 속이는 말만 있는데도 할머니들은 그 말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판단력이 흐리고 자기들을 재미있게 하는데 인간적으로라도 사주어야 한다는 인정이 앞서서 자식들에게 억지를 써서라도 돈을 마련하여 상품을 사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약장사들의 주된 목적은 상품을 어떻게든지 파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래와 만담과 노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들만 하고 있습니다. 그 말들 속에는 일시적인 재미는 있지만 진실은 없습니다. 약장사의 단어는 제한된 단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합니다. 일종의 반복학습 효과를 노리는 것이지요. 자꾸 듣다 보면 실제 홍보하는 상품의 효능이 있을 것으로  믿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교사와 대학 교수의 말

그 다음 말 잘하는 사람은 교사나 대학교 교수들입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 논리 정연하여 하등의 비판 받을 일이 없는 계층입니다. 소위 지식인, 지성인, 양심인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가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도 역시 옥의 티는 있기 마련입니다. 정부 각료 인선에 교육계 인사들이 추천되었다가 각종 비리와 부정으로 인해 낙마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역시 그들도 말과 행동에는 따로국밥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각계각층의 지도층이 부패하지 않는 곳이 없구나 하는 한탄만 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날 교육계는 인성과 품성을 강조하는 인격교육은 전무합니다. 고득점을 따는 기능적인 교육만 있어 점수 따기 인간으로만 키워지는 현실입니다. 특히 학원은 그러합니다. 역시 할 말은 많지만 생략합니다. 

현란한 예수쟁이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입니다. 사회에서 말 잘하는 사람을 가장 먼저 꼽으라면 기독교인(예수쟁이)을 말합니다. 이는 불신자들보다 사회교육을 더 많이 받고 있는 영향일 것입니다. 즉 평생교육을 받고 있으니 보고 들은 게 있어서 당연히 말을 잘 하겠지요. 평균적으로 주3회 이상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하고 교인들과 이야기(학습토론)를 하게 되니까 자연히 사용하는 단어가 많기 마련이고, 특별히 전도교육을 받아 이야기를 하니까 자연적으로 말을 잘 하는 것으로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을 잘 한다는 것이 좋은 이미지가 되면 좋은데 문제는 비아냥거리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과 행동이 따로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교인들이 물에 빠지면 입만 물위로 내밀어 살려 달라고 외친다는 겁니다. 이만큼 교인들의 품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 현실입니다.

교인들이 그렇다면 목회자들은 어떻습니까? 교인들이 누구한데 교육받고 설교를 들었겠습니까? 목회자들 중에는 물론 하나님의 종으로 신실한 종으로 인격과 신학적 학문과 사회적 소양과 품성을 겸비한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1천2백만 성도들의 사회적 신용도가 저하된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종교적 의무와 윤리만 가르치고 사회적 윤리는 소홀이 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동산 투기를 하든 부정부패를 하든 상관없이 헌금만 많이 하는 교인을 하나님 잘 믿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장로로 권사로 임직하는 풍토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사회적 관행과 생리가 교회 안에서 그대로 도입되어 교회인지 사회조직인지 헷갈릴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지금의 한국 대형교회는 거의 회사조직과 유사한 인력관리와 재정,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목회가 아니라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브랜드 목사들의 말(설교)은 많은 팬들을 있게 합니다. 브랜드 목사들은 은혜를 사모하는 교인들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분별없이 하나님의 말로 자동번역 되어 들리고 있습니다. 많은 팬들을 확보할수록 그들의 몸값은 올라가게 됩니다. 초빙하는 교회가 많아지게 됩니다. 마치 인기가 많은 가수나 연기자들의 몸값이 올라가듯이 말입니다.

브랜드 목사들의 연봉은 대기업의 회장 연봉과 맞먹습니다. 사실 이러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목회자들의 평균적인 연봉 수준에서 받으면 되는데 브랜드 목사들은 그게 자기의 권리라고 당연한 듯 상류층 수준의 행복과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아골 골짜기나 광야가 아닌 안락한 자가용과 아파트에서 때로는 골프도 치고 여유 있는 레저생활도 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소위 목회 성공의 사례로 인식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지 목회 성공하기 위해 안달을 부리는 것이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현실적 몸부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테크닉 세미나에 문전성시를 이룬다고도 합니다.

앞서 정치인들이 자기 자신의 지식과 지성을 홍보하기 위해 책을 출판하듯이 목회자들도 여건이 되면 설교집을 출판하게 됩니다. 과연 이런 설교집들이 손수 연구하고 신학적 노력의 결과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대부분 설교집들은 표절과 짜깁기 식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그래서 설교집 또한 여간해서 보지 않습니다.

말은 잘하는데 존경은 없다  

앞서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목사의 사회적 신뢰도가 최상위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국회의원보다 더 아래에 있습니다. 어찌할 것입니까? 목회자 수급정책을 조정하여야 힐 필요가 있고 인플레현상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교육이 제대로 되어야 하고, 목회 기능사가 아닌 인격과 품성이 겸비한 목회자를 양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된 목사들만 목사 안수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에 대한 논의가 있는 모양입니다. 반가운 현상입니다.

말 잘하는 사람보다는 품성이 뒷받침되고 신실한 목사가 요구되는 때입니다.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 한마디 속에 모든 복음의 메시지가 응축되어 있으면 됩니다. 사실 부가적인 주석과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들은 그동안 말 잘하는 사람을 명설교가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수요공급의 법칙대로 변호사, 약장사, 정치가들처럼 속이 없는 빈말만 지껄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꼭 말을 많이 해야만 전파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같이 성도들의 생활 자세를 보고 믿는 이들이 많아져야 진정한 복음의 전파일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어떤 때는 녹음테이프가 돌아가듯이 줄줄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스스로도 놀랄 것이고 듣는 사람도 놀랄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능력이 어디서 나왔을 것인지 검증해 봐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냐 아니면 사탄의 능력이냐 아니면 기계적 반사작용이냐 아니면 방언같이 그저 지껄이는 것이냐 로 말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야단법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하게 복음을 전하시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일반적인 교회 예배형태를 보면 낮 예배는 유교식으로 그 이외는 세미유교식으로 철야기도회나 부흥회 때는 야단법석의 예배인 경우가 많습니다. 야단법석이란 원래 불교가 초창기에 들에서 단을 쌓고 북 두드리고 징을 치면서 (팔관무·승무) 의식을 행하던 데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이런 의식이 변질되어 후대에는 아예 단어 자체의 의미가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말로 야단법석 떠는 부흥회  

지금 그 야단법석이 우리 교회가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철야기도회나 부흥회를 보면 각종 전자악기와 팝송의 복음성가로 감정 북돋우는 쇼를 하는 것이 그게 은혜 받는 도구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의 라이브 쇼인 셈입니다. 한참 흥을 돋운 다음에 설교는 약장사, 약 파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약발(설교발)을 잘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게 우리 한국교회 부흥회의 현주소입니다.

어느덧 교회 안에서 조용한 예배와 묵상은 없어지고 통성기도와 야단법석의 예배만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질퍽한 라이브 쇼와 한판의 굿판(푸닥거리)으로 은혜를 갈구하는 무당과 무속적인 관객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쇼가 주는 쾌감이 은혜로 한판의 굿판이 주는 황홀감이 치유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을 성령의 은사로 오인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 분석과 검증이 제대로 되어지지 않으면 복음과는 상관없이 시내산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분명히 야단법석을 떠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는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종이 나와야 할텐데 그럴 가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교인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브랜드 목사들이 야단법석을 부추길 것입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말을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진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이 번지르 하면 그 속에는 거짓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칠 대상자를 그럴듯하게 속아 넘어가게 합니다. 복음의 사기꾼들이 득실거리는 한국교회의 야단법석 속에는 복음도 없고 예배도 없습니다. 단지 부수입으로 떨어지는 돈과 사탄적 카타르시스와 브랜드 목사들의 인기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폐쇄적 자아도취만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사회의 불신과 조소만 메아리로 남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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