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1)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란, 기존 기독교에서 볼 수 있었던 여성안수와 여성 비하를 정당화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성차별 없는 상호 평등과 섬김의 기독교를 의미한다. 모성애적 기독교는 권위로 군림하지 않으며 오직 끊임없는 사랑으로 치유하고 설득하려는 어머니적 모습의 기독교다. 여기서 '모성애적 기독교'라는 의미는 성정체성을 궁극적으로 상정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님을 알기 바란다.

이것은 단지 기존의 기독교와 그 역사가 지금까지 얼마나 뿌리 깊게 가부장적 지배이데올로기의 기능을 해왔는지를 여실히 폭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과정적 기독교를 의미할 따름이다. 성서마저 특히 여성에게는 매우 불리한 언급이 많은 현실에서 우리네 기독교가 더 이상은 여성을 억압하는 기독교여서는 곤란하잖은가. 오히려 약자인 여성을 더욱 해방시키는 기독교여야 참으로 바람직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21세기 기독교는 지금까지의 가부장성을 극복하는 모성애적 기독교를 지향함으로써 더 나은 전망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성차별을 정당화해왔던 가부장적 기독교의 면모들을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에서 대략이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은 지금까지 여성이 기독교 역사에서 얼마나 끔찍하게 당해왔고 어떻게 이것이 기독교 안에서조차 가능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것과도 관련한다.

성경 속의 성차별적 구절

사실상 여성신학자들이 가장 당혹스런 했던 점은 기독교의 역사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성서 자체 안에서부터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역사가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이 부분은 '한국여신학자협의회'가 펴낸 「함께 참여하는 여성신학」(대한기독교서회)에 잘 정리되어 있기에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특히 이 책은 어느 한 명의 글이 아니라 많은 여성신학자들의 글이 담겨 있어서 여성신학에 처음 관심하는 분들에게도 꼭 추천할 만한 도서라고 생각된다).

▲ ⓒ뉴스앤조이

우리는 기존 기독교가 왜 자꾸만 가부장적 체제와 성차별적인 성향을 보여 왔는지에 대한 그 근본적 원인을 밖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성경 안에서부터 성차별이 현존하는 놀라운 사실을 말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여성은 종종 가문계승의 도구로 자리매김 되기도 하는 구절―창16:1~16, 창 29~30, 삼상 1:2~20, 룻 4:18~20, 룻 4:4~10 등―을 우린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구약시대가 매우 엄격한 가부장적 사회인 점을 감안하면, 창세기 38장에 나타난 대를 잇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다말의 경우는 한편으론 참으로 안쓰럽기 그지없다고 하겠다. 그것은 가부장적 사회에선 후대의 모범으로까지 남을 만큼 칭찬할 만한 것으로 회자된다. 신명기 25장에는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한다고까지 나온다. 성경은 은연중에라도 가부장적 체제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성경을 보면 여성 역시 여전히 남자의 재산목록 가운데 하나로 취급된다. 네 이웃의 소유 안에 소·나귀·남종·여종 뿐 아니라 아내까지 포함되고 있다(출 20:17). 사무엘하 11~13장을 잘 살펴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것은 여인에게 해를 끼친 죄이기보다 남편 우리아에게 속한 것을 침해한 죄로 얘기되고 있다. 물론 이외에도 여성의 존재는 남성에게 속한 것으로 묘사한 구절이나 비유한 언급은 성경에 허다하다.

신명기 21장 11절에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도 좋다고 말씀한다. 게다가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는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라"(민 31:18)고 말씀하신다. 그래서인지 시스라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기다리며 "틀림없이 약탈한 것을 모아 나누겠지 용사 하나에 여자 하나씩 또는 둘씩"(삿 5:30) 취하느라 귀가가 늦는 줄 안다. 또한 똑같은 입장에서 딸이 유산을 상속받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허락되지 않으며 허락되더라도 매우 특별한 경우에 속하고 있다(민 27:8).

여성은 재산목록의 하나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남자들이 여성을 임의로 처분하는 것은 당연히 자연스럽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다른 이에게 잠자리를 같이 하라고 내주거나(창 12:10~20, 20:1), 롯은 소돔사람들에게 처녀인 자기 딸을 주겠다고 한다(창 19:4~9). 한 레위인은 기브아에서 자기 첩을 무뢰배들에게 내주기도 하는데, 매우 서글픈 사실은 그 여자는 밤새 욕보임을 당하고선 결국 죽고 말았다는 점이다(삿 19). 그 여인의 고통과 한을 누구 알고 있는가.

성경에 따르면 여성의 종속을 정당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예컨대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것을 두고서 그렇게 해석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창세기 3장 16절의 "남편은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 구절은 오랫동안 여성을 남성의 종속된 존재로 정당화해 주는 구실을 해왔다.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기독교의 역사에선 여성은 종종 '악의 근원'으로 취급된다. 즉, 죄의 근원은 결국 하와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결혼은 원래 양편이 순결을 지켜야 함에도 성경도 종종 남자보다는 여성의 순결을 더 강조하거나 일부다처제의 모습을 이미 정당화하는 구절을 많이 보여주곤 한다. 신명기 21장 15~17절을 보면 사랑 받는 아내와 미움 받는 아내를 얘기하지만 적어도 두 아내를 인정하고 있다. 무적의 용사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서 친아들이 70명이나 된다(삿 8:30). 영웅호색인가. 결혼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지만(신 24:1) 여자는 그럴 수 있는 규정이 없다.

슬프게도 결혼한 여자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고발당하면 그 아버지는 자기 딸이 처녀였음을 증명해야 하고, 입증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아비의 집문 앞에서 친정이 있는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라는 놀라운 규정도 성경에 있다(신 22:13~21). 물론 간음할 경우 남자든 여자든 둘 다 죽일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결정적 문제는 남자는 여자처럼 순결함을 증명해야 한다거나 총각이 아니었다고 돌로 쳐 죽이라는 그런 규정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형평성을 잃은 것이다.

성경은 여성을 부정하고 더러운 존재로 묘사하기도 한다. 즉, 여자가 태어나면 남자보다 두 배의 날 수로 정결 의례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레 12:2~5). 똑같은 경우인데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이러한 점은 성경 역시 생물학적 차이를 성차별로서 의례화한 사례에 속한다. 또한 레위기 15장 19절 이하를 보면, 여성의 생리현상도 매우 부정한 것으로 얘기되는데, 그 여자가 앉았던 자리뿐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말씀되고 있다. 또한 월경이 아닌 하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부정하다(레15:25).

또 성경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도 종종 얘기하곤 한다. 전도서 기자는 남녀를 비교하면서 "해답을 찾는 남자는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만 여자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다"(전 7:28)고 말한다. 레위기 27장 1절 이하를 보면, 남자와 여자를 서약예물의 값으로 환산할 때 똑같이 공평하게 정해주지 않고, 여자는 남자의 거의 절반 값으로 정해놓고 있다. 이 역시 생물학적 차이를 차별로서 정당화하고 있는 사례에 해당한다.

민수기 12장 1~15절을 보면, 아론과 미리암은 똑같이 모세를 비판했음에도 여자인 미리암만 문둥병에 걸리는 것으로 나온다. 정말 성경에 쓰인 하나님 마음은 엿장수 마음인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민수기 5장 11~13절을 보면, 질투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고발당한 여자에게만 가혹하고 여자가 질투한 것이 아닌 경우에도 고발한 남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구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약에 이르러서도 가부장적 한계는 여전할 따름이다. 이미 잘 알다시피 성서 기자조차 여성은 사람 수에 넣질 않고 있다(막 6:44). 이는 당시의 유대사회 랍비들이 매일 감사기도 목록에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을 정도였으니 충분히 짐작할만하다고 하겠다.

유명한 사도 바울의 언급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구절이 있다. 그는 말하길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아내의 머리는 남자"(고전 11:3)라고 말한다. 적어도 이것은 남녀의 관계가 수직적 차원도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 수직적 복종관계는 에베소서 5장 21절 이하에서도 또 얘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라고 말하지만 여성에게는 머리에 무엇을 쓰라고 말한다(고전 11:4~6). 그 잔재인지 오늘날 가톨릭은 여성에게 너울을 쓰고서 예배를 드린다. 공평한 처사라고 하기엔 이해하기 힘들다.

이외에도 바울은 여성에 대한 권리 제한을 몇 가지 더 말하고 있는데, 여성은 교회에서는 말할 권리가 없고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한테 물어보라고 말한다(고전 14:34~36). 여자는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침묵을 지켜야 한다(딤전 2:11~12)는 것이다. 적어도 사도 바울에게서는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고전 11:7)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바울을 좋게 해석할 경우 윗 구절도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바울은 본래 평등관계를 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저 유명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이 구절은 바울을 매우 돋보이게 하는 레퍼토리로 종종 얘기된다. 그런 면에서 성서는 참으로 해석자에게 열려 있는 경전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 쓰인 여성 차별은 이뿐만이 아니다. 성경은 여성을 아예 왕따시키기도 한다. 계약의 증표인 할례는 남자에게만 해당한다. 또한 남자만 절기를 지키도록 규정되고 있다(신 16:16). 성경 어디에도 여자 제사장 기사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 뿐인가. 예수의 열 두 제자들 가운데 여성은 하나도 없다. 정말 예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여성은 한 명도 없었을까를 생각한다면 개인적으로 나는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다.

즉, 열두 제자라는 그 상징성은 구약시대의 열두 지파에 대한 상징성과 맞추려는 초대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도권 확립의 성향적 예증으로 생각된다. 사실상 예수의 공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는 언제나 여성과 가까이 있었고(눅 8:1~3, 막 15:41), 여성은 주의 십자가 현장에까지 끝까지 남아 있었을 뿐더러(막 15:40~41), 사실상 부활의 첫 증인이기도 하다(막 16:1~8, 요 20:18). 하지만 이후의 초기그리스도교 공동체 형성의 예수의 부활 증인 명단에선 여성은 슬그머니 빼버린다(고전 15:4~5).

성경 역시 시대적 상황의 한계를 안고 있다

성경 역시 시대적 상황의 한계를 안고 있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경전으로 보는 성경도 역시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진 못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E. H 카아의 유명한 책인「역사란 무엇인갯 에서 밝혔듯이 역사에 대한 해석이란, 언제나 현재의 상황에 자리 매김된 해석자에게 늘 열려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서에 대한 해석과 이해 역시 그것은 '과거 그대로의 재현'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 자체'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 안에도 명백한 성차별적 구절이 많은 것을 보고서 굳이 놀라워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하겠다. 성경은 해석자에게 열려 있을 뿐이다. 특히 성차별과 관련해서 성경을 본다면, 성경이라는 경전의 한계는 명백하게도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경에는 성차별적 전통의 흐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 안에는 여성해방의 맥 역시 도도히 담고 있다.

예컨대 재산 상속의 권리를 찾은 여성들(민 27:1~11)이나 또는 미리암·드보라·에스더 같이 민족을 구하는 여성들의 지혜스러운 역할 역시 같이 언급되어 있을 뿐더러 바울도 동역자 가운데 여성을 많이 언급하기도 했었다(롬 16:1~15).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여성해방의 절정은 역시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이라고 하겠다. 사실상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에는 여성들의 따름과 역할이 컸을 뿐더러 이들은 그 어떤 남성 제자들보다도 섬김(디아코니아)의 도를 익혔던 자들이었다(막 15:40~41, 눅 8:2~3).

따라서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성차별과 여성해방이라는 그 두 가지 전통의 맥을 같이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에 설 것인가. 바로 그런 점에서 성경은 참으로 해석자에게 열려 있는 책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성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해왔지만 지금까지 숱하게 사람을 죽이기도 해왔었다는 점을! 이것은 나의 무슨 새로운 주장도 아니며 역사에 이미 있어왔던 사회적 사실(fact)일 따름이다.

교회사 속의 성차별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살펴본다면, 여기에는 그 어떠한 성차별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 반대인 역차별적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하겠다. 즉, 예수는 힘없는 약자인 여성을 남자들보다 더 사랑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사회는 여성과 6세 미만의 어린이들과 얘기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했을 정도인데, 그런 면에서 예수의 모습들(막10:1~12, 마 18:1~5)은 당시로선 매우 신선한 혁명이었을 뿐더러 당연히 많은 유대 랍비들을 매우 혼란스럽고 불편스럽게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이 평등관계를 보였음에도 이후의 기독교는 또다시 그 시대적 한계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이는 교부시대-중세시대로 갈수록 그 강도는 점점 더해졌다. 여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점차적으로 제도화 조직화 되면서 일찍이 헬라철학의 관념적 이원론이 기독교 신학에 스며듦으로 인해 그 치명적 고착화가 형성된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같은 관념적 이원론의 도입은 기독교 안에 여자는 육적이고 남자는 영적이며, 여자는 악하고 남자는 선하다고 보는 그러한 사고의 유형들이 점차적으로 확립된 것과 같이 맞물려 있다. 공교회 이후에도 기독교는 지속적으로 ―특히 성경의 창조설화에서― 여성의 열등성과 여성의 종속 정당성을 부여하고 여성을 악의 기원으로 봄으로써 여성을 혐오하고 부정하도록 이끌었으며 "남성은 영혼, 여성은 육체"라는 도식을 적용하였다.

교부신학자 제롬은 여성이 성을 포기하고 처녀나 과부로 지내면서 금욕생활을 하면 찬양을 받게 된다고 했다. 당시로선 육체적인 세계가 영적인 새로운 창조로 변형될 것으로 여겨서 동정녀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를 깨끗한 하늘나라로 만드는 지름길로 보았었다. 이런 전통은 마리아 숭배로 발전되어 A.D. 649년에는 '마리아 영구 처녀성'을 선언하게 된다.

우리가 스콜라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로 알고 있는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 바 있는데, 남성만이 온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며 여성은 남편에게 종속되는 것이 자연의 질서다. 여성의 본질은 육이고 남성의 본질은 정신이기에 자연의 질서 속에서 육체가 정신에게 복종하듯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 다른 중세의 대표적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수태는 남성만을 생산하도록 되어있는데 어떤 우연에 의해 남성 형상이 파괴되어 여성을 생산하게 되었고, 불완전한 여성은 본성전체가 열등하며 여성은 단지 번식을 위한 필요악으로서의 가치만 있을 뿐이라고 얘기한다. 그는 어이없게도 남성은 똑똑하리만큼 지적이지만 여성은 육체적이고 성적이며, 무덤에서 마리아가 예수의 부활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이해력이 둔해서라고 보았다. 하지만 아마도 오늘날 이런 주장에 대해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본다.

중세시대가 여성에게 저지른 끔찍한 사건은 마녀 학살이다. 13~17세기에 그것도 약 100만 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교회에 의하여 마녀로 몰려서 억울하게 고문되고 처형된 점이다. 마녀학살은 중세 때 크게 횡행한 흑사병과 오랜 동안 지속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그 당시의 시대적 불안들이 결국 여성을 그 희생양으로 삼은 사건이라고 하겠다. 당시 중세교회는 여성을 매우 변덕스럽고, 우둔하며, 음란하기 때문에 쉽게 마술에 빠지는 존재로 인식하기에까지 이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면, 중세에 비해 여성 혐오나 결혼 기피는 조금 완화되지만 여기에도 여전히 성차별적인 성향은 이어져 오고 있다. 루터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여성의 소명을 가사노동과 결부시켰다. 이는 저 유명한 「기독교 강요」를 썼던 칼빈도 마찬가지인데, 게다가 그는 부인에 대한 남편의 법적인 권리를 육체적인 권리에까지 허용하였던 입장이었다.

현대신학에 이르러서도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종관계는 구조적이며,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여자의 신앙적 응답은 자기의 합당한 위치를 지키고 남자의 선도를 따르는 데 있다고 얘기한다. 그는 말하길, 여자가 진정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항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한 여자의 반항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 모독하는 것이라고 보았었다. 본회퍼라는 신학자 역시 그의 「옥중서간」에서 여자는 그의 남편에게 종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기독교 역사상의 유명한 신학자들이 이러한 성차별적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그들의 신학적 업적 역시 폄하되어야 할 것은 아니지만, 종종 이들에 대한 신뢰나 권위가 지나치게 과잉하여 저들의 성차별에 대한 과오마저 묵인되거나 암묵적으로 간과되어서도 안 되기에 이를 언급한 것으로 헤아려주길 바란다. 다시 말해 알게 모르게 저질러 온 기독교 역사의 성차별적 발언들이 기존 기독교의 가부장적 체제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치명성을 인지한다면 이 또한 결코 방관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교회 현실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을 보자. 단적으로 말해서 교회 목사들 집단은 왜 그리도 남자들만 바글대는가. 우리가 '교회공동체'라는 것을 떠올리면 언제나 꼭 남자(목회자)의 카리스마에 휘둘려 있는 임의의 집단이 떠올려진다. 각 교단과 교파의 총회 현장을 가보라. 맨파워(man power)들로 득실득실하잖은가. 한국 기독교 역사 초기에서부터 여성들의 역할과 활약은 교계에 매우 중요한 공헌들을 했었을 뿐더러, 여성이 전체 교인수의 70%를 차지함에도 말이다.

▲ 오늘날 한국교회는 전형적인 남성 주도 사회며, 교계의 중요한 의사결정들은 남성들의 독점으로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뉴스앤조이 이경근

아직까지도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이 문제를 첨예한 것으로 여기는 교단도 여전히 많다. 소위 기저귀 찬 여자들은 강대상에 올라가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발언들은 그들 보수 진영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얘기들로 보인다. 즉, 이들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그 근거 역시 성경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여성안수제도에 대한 정착은 이전에 비하면 꾸준히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성목사안수가 가능한 진보 교단조차도 실제적인 목회현장에선 여성 목회자는 불러주질 않고 있는 실정이라 여전히 심각한 문제라고 하겠다.

▲ 반면에 애석하게도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그저 대부분 가사노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모 교단총회가 열리는 교회에서 여성교인들이 식사준비를 하는 모습이다.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내가 볼 때 이 같은 현재 시점에서는 적어도 남자와 동등한 능력일 경우 그러한 여성 목회자가 있다면 오히려 인센티브라도 줘서 데려와야 할 만큼 제도적으로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루바삐 여성이 교단 총회장으로 나올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해본다. 그만큼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교회제도에 대한 민주적 개선은 뒤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언급될 것이다.

만일 현재적 상황이 여성으로선 더욱 차별받는 불공평한 현실이라고 한다면 공평하신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경우 남자와 여자에 대해 똑같이 대하실까? 오히려 궁극적인 공평함을 위해서는 현재에선 남자보다는 여성을 더 편애하시는 것이 더 공정한 것이잖은가. 그렇기에 나 자신은 예수가 남성보다는 약자인 여성을 더 많이 우선적으로 사랑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왜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더 중요했겠는가. 결국 그 이유도 궁극적인 공평함을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이제는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성경 역시 한계를 보이고 있는데, 하물며 교회사 속의 유명 신학자들의 성차별이야 거론해서 뭣하랴. 이제는 시대가 흘러갈수록 우리는 적어도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중요성과 평등관계에 반하는 성차별의 부당성을 점점 당연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또 알게 모르게 희생되어 왔던 저 수많은 희생들과 억울한 죽음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아비의 서원기도로 죽은 입다의 딸의 서글픈 한의 눈물, 여전히 잘 기억하지도, 잘 기념하지도 않고 있는 향유 옥합의 무명 여인(성서는 이를 기념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있다) 등등. 아직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의 한 많은 눈물을 기억함으로써 앞으로도 끊임없이 여성해방의 전통들을 되살리고 기독교 안의 뿌리 깊은 가부장성부터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21세기의 한국 기독교는 그동안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거나 이를 저질러왔던 잘못된 과오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새롭게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모성애적 기독교는 여성해방을 중요시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남성도 여성도 하나님 안에서의 온전한 상호평등을 위해서이며, 현재의 부조리한 가부장적 습성의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단지 여성해방의 맥을 중요시할 따름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바야흐로 문명 전환의 새로운 흐름이 여성성을 꽃피우는 물결로 나아가고 있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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