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친구가 신학교 졸업논문으로 '출애굽에 나타난 노사관계'를 쓰고 싶다고 지도교수에게 말하자, 당시 진보적 구약학자인 교수는 그것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해 줄 자료나 근거가 없으니 다른 것을 쓰라고 했다고 한다. 

말로는 되는데 글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아마 썼더라면 논문이 아니라 간증이나 설교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것이 역사적으로나 앞으로도 꼭 필요하고 좋은 것인지 살펴볼 겨를이 없다는 데 있다.

노동조합 영국서 처음 생겨

노동조합이란 말과 노동조합이 처음 생긴 나라는 영국이다. 그것은 영국이 당시 산업혁명의 발상지로 공업도시가 제일 먼저 형성되고 사회구성원의 분화가 가장 빨리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사회구성인 농업사회-목축사회-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농촌의 노동력을 도시로 유입하기 위해서는 농촌의 피폐화가 필요했다.

인클로저 운동(양모의 원사를 위하여 토지 경작지에 방목을 하기 위해 양의 울타리를 치는 것)이 바로 그런 일중의 하나였다. 어려워진 농촌 사람은 도시로 이주하였고 값싼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의 저 임금으로 자본가들은 높은 이윤을 창출했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과 영양실조 등 건강의 문제도 만연했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불행의 원인을 빠르고 성능 좋은 기계가 주범이라 생각하고, 기계를 파괴(러다이트)했다. 잠깐의 시간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지만 자본가들은 이에 맞서 노동자들을 법으로 규제하고 처벌했다.

한편 높은 출산율로 인한 아동의 증가, 하층 노동자들의 인간 이하의 생활은 성윤리의 희박과 유아노동, 매독과 전염병 등으로 수명이 단축되고 사망률도 높아갔다. 자본가들은 생각했다. 새로운 조건과 장기적인 노동력 공급을 위한 수단으로 복지적인 형태의 공제조합(의료보호나 연금등)을 연구해냈다.

공산주의와 노동운동

그때 참상을 본 마르크스나 엥겔스 외 역사철학자들은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 근본적인 문제와 대책을 글과 편지로 남겼다. 마침내 그것이 '공산당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뭉치자"로 나타났다. 골자는, 노동자는 자기 노동 과정과 생산물에서 소외를 느낀다는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것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불행을 느끼며, 자기의 생산물로 이윤을 누린 자본가들의 부와 과시에 대하여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노동력도 상품인데 그 상품을 정당한 가격에 팔고 살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을까? 연구하고 생각했지만 자본가들의 탄압과 회유는 만만치 않았다. 나중에는 그것이 안 되자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적 소유의 철폐와, 무산계급이 주인이 되는 사회에 대한(실제로 엥겔스는 신약성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타난 초기 원시공산사회를 지향하던 이들은, 소수의 자본가를 위해서 죽도록 일만하고 대를 물리는 가난과 저소득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했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어 함께 공유하고 쓰는 사회를 만들자, 그러려면 모든 자본과 공장의 주인은 국가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유제산제를 폐기하자고 한 것이다.

이러한 실험이 영국에서는 이미 자본가의 힘이 뿌리를 내렸고 자본가가 법률과 경찰 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후진 개발국으로 농민의 문제로 구체제와(짜르) 싸우는 구소련에서 성공을 하게 된다. 각설하고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근대의 노동자들은 이 거대한 물결에 참여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세력에게 빼앗기지 않고 제한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유럽 나라들은 노동조합운동을 활성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었다. 늙어 죽을 때까지 노동자라는 것 외에는. 그 뒤 노동조합은 지도자들의 이념과 나라의 형편에 따라서 페비안니즘, 사회주의, 조합주의, 사민주의 등으로 변화를 겪으면서 나라마다 빠르게 자본주의가 정착한다.

유럽의 노동조합에 대한 시각

가톨릭은 당면한 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은 벨기에의 조셉 가르댕이라는 신부로부터 시작했다. "노동자를 선두로"라는 구호를 걸고 노동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교회와 사회에 환기시켰고 나아가 가톨릭 내 노동자들의 신앙을 다져 나갔다. 그러나 자본가 편에 있던 구교회는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조합의 결성으로 노동자들의 발언과 자유가 신장되자, 급속히 신도들이 이탈하고 젊은이들을 잃어버리게 됐다. 교황청은 '노름 레바름'이라는 노동에 관한 칙서를 발표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대책을 세운다. 그렇게 해서 JOC라는 노동자 조직도 카르댕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영국은 국교회인 성공회와 웨슬리의 후예들인 감리교회가 노동자들을 위한 돌봄의 사역을 하였지만, 결국은 노동자 정당이 만들어지고 교회의 할 일은 적어진다. 프랑스의 경우도 당시 구교회의 분위기는 억압받는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 직접 관여하기 어렵게 되자, 의식 있는 교구와 성당에 노동자들을 도와주는 상담을 하거나 사제노동자(Work Priest)로 지원한 신부를 파리 외방선교회에 두어 노동자들의 생활과 상태를 돌봤다. 모두가 교회의 생존을 위한 골육지책이거나 인간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의지였다.

우리가 지칭하는 산업선교(Urban Industrial Missin)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고 배웠다. 독일의 경우는 교회가 직접정치에 가담하고 있고, 기민당이나 사회당의 당원과 모체가 개신교회다. 그래서 산별노조 가운데 기독노조도 있었다. 이러한 교회와 유럽 국가들의 노력은 ILO(세계노동기구)의 탄생을 가져 왔고, 이렇게 인간적이고 표준적인 규정을 정하고 다른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돕는 대륙별 기구나 단체나 기구가 생겨났다. 훔볼트 같은 재단(서강대에서 노동조합지도자 교육)이 이에 속한다. 이 기구는 종교 기관은 아니지만 기독교적인 이념으로 창설된 기구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WCC)에도 URM(도시 농어촌선교)부를 두어 ILO의 기준에 미흡한 나라들과 노조들을 깨우치고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70,80년대 이 기구의 도움으로 그런 훈련을 받았거나 지원을 받은 단체들이 많았다(영등포산업선교회). 미국의 경우 산별노조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대거 일했다. 철강노조의 렘지위원장은 교회의 장로로 한국의 노동자들과 산업선교를 격려하러 오기도 했다. 자본가들의 탄압도 백색테러도 만만치 않아 마피아를 통한 고용살인(영화 마론 브란도 주연의 워터 프론트와 언터처블)도 있었다. 특히 미국 광산노동의 어머니 마더존스나 라틴계 일용 이민 노동운동의 지도자 시져 차베스 등이 모두가 교회 출신이다.

아시아와 우리나라 경우

아시아의 경우, 필리핀의 공업도시인 론도 같은 곳은 일찍이 다국적기업의 중심이었다. 민족적 자본에 의한 산업화가 더디므로 노동운동이 발전되지 못했다. 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가 민족자본이 약하고 산업화의 진행이 더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선교가 한국에서 유명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고 본다.
 
1. 한국의 기성노조는 남성중심의 어용노조이거나 조합주의였다.
2. 한국의 노동조합은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3. 한국은 산업화의 발전 모델을 추친한 나라다.
4. 한국의 산업선교는 해외 선교사들에 의하여 도입되었다.

남한은 해방이 되자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운동을 제압하고, 미국식 자본주의 계열의 노동조합을 육성하자는 미국식 노동법이 들어온다. 일제하와 해방공간에서는 민족독립운동과 같이하는 전투적인 노조 활동은 해방 뒤 급속히 몰락하거나 체제로 개량화된다. 더욱이 6·25를 통한 이념 대립은 그러한 싹을 송두리째 잘랐다. 그렇게 20여 년이 흐른다.

그래서 남한의 노동운동은 노동조건 개선과 조합주의 중심 운동이라기보다 체제저항의 성격이 강한 노동운동이었다. 그것은 정치노선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 있지만 조합의 존립자체를 무너지게 하는 투쟁은 사실 무모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모순이 노동과 자본의 모순보다 독재와 반민주 성격이 강한 점에서 모든 운동은 학생운동, 양심적인 지식인과 교회까지도 정치투쟁적인 과제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70년대 초 남한사회는 정치와 학교 바닥에서부터 박정희의 군사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결국 전태일의 분신(이를 계기로 학생운동과 노동문제가 만나는 접점이 되었다. 수배 중 숨어서 전태일 평전을 쓴 고 조영래 변호사, 장기표, 김근태(우리당) 등 학생운동 출신이 노동자들을 돕거나 최초로 직접 현장 노동자가 된 김문수(한나라당)같은 위원도 등장하게 된다.  

노동조합은 아무나 할 수 있는가? 현재 노조를 구분하는 틀로 크게는 화이트칼라(지식인) 블루칼라(생산자)로 나누지만 최근에는 골드칼라(지식 정보산업)로서 보수체계와 작업형태에 따라서 새롭게 분화되고 있다. 그리고 과거 전통적인 노동자 군으로 현재는 퇴락하는 광산과 항만, 금속(자동차는 이원)과 섬유 화학 체신 철도 등은 한국노총산하와 그 외 80년대 이후 생겨난 신생노조 조직으로 민주노총 산하의 언론, 철도, 사무금융, 연구원, 병원, 교사(전교조), 최근의 공무원과 기독노조가 있지만 노동자의 뉘앙스는 어디까지나 산업노동자들로 지칭한다.

며칠 전 일본에서 이주한 아시아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하여 일하는 일본인과 함께 대판부청의 연합노조간부와 만난 자리에서도 한국도 이제는 노동운동이 힘이 있고(인텔리와 고 임금지대)능력이 있는 곳으로 편중되고 있다. 노조를 조직하지 못하거나 노조가 없는 산업의 노동자들은 더 외면당하고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노동운동의 중심은 가장 아픔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더 받고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소연할 곳 없고, 찾아 갈 곳 없는 이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노동자 사랑은 체제를 위해서도 인권의 실현을 위해서도 아닌 성경대로 어떤 "강도당한 불행한 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고 "잃어버린 양을 찾는 심정으로 해야 할 사명" 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가 사회더러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해야 할 판이니 어찌된 일인가?

기독노조의 고용주와 피고용인

현재 노조가 합법적으로 조직되어 있지만 그런 합법을 교회의 기준에 적용하기 시작하면 교회의 앞날은 여러 가지로 큰 어려움이 빠질 것이다. 노조의 구성원은 아무래도 단연 성직자들이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근로환경의 개선을 위해서 그들의 권리를 신장해간다면 그 사용자는 누가 될 것인가? 목사인가 장로인가 하나님인가.

노사에 있어서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가 명확치 않다. 몰론 담임목사가 교회를 대표하는 인사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자신이 고용적인 성격을 띠므로 궁극적인 인사권자는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노동 범주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예배시간인가, 예배를 준비하는 모든 시간인가. 예배가 계약된 노동시간이라면 파업 형태로 예배거부로 설정할 것인가?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특히 부목사의 경우 헌법에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고 있어서 교회의 인사권자와 교인대표(제직회나 공동의회)들이 연임을 청원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해임되 매우 불완전한 직책이다.

그렇다고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들이 부목사를 회사의 직원 부리듯 혹사하는 구조를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교회마저 노조를 만들어서 사랑과 화평으로 협력해야 할 일터가 항시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임금협상을 해야 하고 실력행사도 불사하는 식의(노조에게 허락된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인가) 해결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오죽했으면 기독노조라는 것을 생각 했을까 하는 점은 이해하지만, 역사적으로 봐도 교회가 가난하고 어려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했지, 자신과 직원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노조를 만든 적은 없어 보인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교회가 사랑과 봉사를 미끼로 적은 월급과 무한정의 시간의 봉사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변모하는 사회에서 성장하고 있는 인권신장의 차원에서도 그동안 성직자와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사찰과 사무원 기사 등의 처우는 개선되어야 한다. 교회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지 노조의 형태와 영역으로는 그 해결이 어렵다는 것이다. 교회에 소속되어 그런 피해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중 얼마나 되는가. 그것이 마치 한국교회에 노조가 전부 조직되고 교회마저 노조에 휘둘릴 것인가에 대한 조바심이 생긴다. 그것은 기독교 언론의 침소봉대와 기사거리 찾기에 기인한다.

결론은, 교회는 사회법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법이 허락했다고 해서 합법적일지는 몰라도 교회란 사회법과 교회법의 허용 문제가 아니라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교회의 대다수 목회자와 교인들은 교회마저 노조로 편입해 사회적인 제재를 당하는 것에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투쟁하지 않는 노조는 노조가 아니다. 가장 체제화되었다는 일본에서조차 춘투(春鬪, 단체협약을 갱신하는 봄에 조직의 단결력을 높이고 세의 과시를 위해서 하는 것을 지칭)가 있었다. 싫든 좋든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은 투쟁의 역사이며 피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의 노동절이 된 5월 1일(May day)은 바로 피로 값 주고 산 미국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 쟁취의 날을 기념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마저 그런 역사와 시간으로 들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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