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먼저 우원 이호빈 목사가 한국YMCA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월간 한국YMCA>에 연재되는 전택부 서울YMCA 전임총무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 강남대학교 우원사상연구소에서 12월 13일에 개최한 학술세미나 '우원과 평신도운동' 제2주제를 발표했다. ⓒ안창도

전택부 총무가 위의 책에서 소개한 이호빈 목사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이호빈 목사는 일찍이 예수를 믿고, 1917년 감리교 협동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일본 관서신학교를 다닌 적도 있고 1947년에는 일본 성서신학교를 졸업했다. 목회는 1927년부터 시작했는데, 1931년부터는 만주 훈춘에 있는 구사평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1932년부터는 부패한 한국교회를 개혁한다는 목적으로 이용도 목사와 백남주 목사등과 같이 교회개혁운동을 떨쳐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드디어 1933년에 '예수교회'라는 새 교단을 창설했다. "무기력한 교회의 재생은 부흥운동으로 가능하다. 부흥운동은 회개와 기도와 사랑의 실천으로 가능하다"라고 말한 이용도 목사와 같이, 그리고 히브리어와 라틴어에 능하여 요한복음을 새로 번역하였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어거스틴의 「참회록」, 스웨덴보르그의 「천계와 지옥」. 썬다싱에 대한 연구 등으로 유명했던 원산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교의 교수인 백남주 목사와 같이, 예수교회라는 새 교단을 창설했던 것이다.(중략)

신임총무 변성옥 목사는 1946년에 이미 서울YMCA 종교부 간사로 있던 이호빈 목사와 종교부 위원장으로 있던 김우현 목사와 같이 Y재건사업에 착수했다. 이 세 사람은 본래부터 뜻이 맞던 동지 간이었기 때문에 손발이 잘 맞아서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호빈 목사는 종교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성경연구반을 만들었다.

약 4백 명의 학생들로 시작하여 4년제 신학교로 발전시킨 대규모 사업이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국제YMCA에서 파송되어 왔던 피치(G.A.Fitch) 박사는 "주야 간 교육프로그램, 4백 명의 학생들이 등록한 신학교, 그 신학교는 4년제 신학교로 발전되었는데, 내가 아는 한 세계 유일의 Y학교이다"라고 격찬한 바 있다. 이 학교가 중앙신학교로 발전되었다.

YMCA운동이 평신도에큐메니칼 운동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면서도 오늘날 한국YMCA가 미국YMCA와 같이 점점 교회와의 관계성이 약화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왔던 터다. YMCA 안에서 이호빈 목사에 대한 연구나 관심이 적었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더불어 현재 한국의 대교회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시점에서 소종파운동체로서 YMCA가 교회개혁에 관심이 적은 것은 한국YMCA에도 교권주의의 그늘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다시 한번 내부를 둘러보게 된다.

한국YMCA 내에서 YMCA가 기독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데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나는 YMCA운동이 기독교NGO운동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교회에서 오랫동안 평신도집사로 봉사를 한 경험의 반영이기도 하다.

1. 우원의 평신도 신학과 종교개혁 정신

나는 우원 이호빈 목사의 교회개혁론이 평신도교육을 중심에 둔, 루터 당시의 만인사제설에 근거한 것으로 종교개혁정신의 발로로 보았다. 이는 발제자가 이미 밝힌 것으로 인용문에서도 이호빈 목사의 평신도 신학 사상이 단순명료하게 밝혀지고 있다.

"교회에 특수층이 형성돼 가지고는 교회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평민적인 데가 있어야 합니다. 항상 특수 의식을 가진 사람이 판을 치기 때문에 교회 문턱이 높아지는 것 아닙니까?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을 교회가 심어주어야만 하는데도 오히려 교회가 한술 더 떠서 앞질러 자리싸움, 감투싸움, 권리싸움을 하고 있으니 이래가지고야 어떻게 “예수 믿으시오”라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 평생의 주장은 평신도들이 건전한 신학 훈련을 받음으로써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는 그가 행한 '그리스도교사상사' 강의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의 핵심이 가톨릭 교회의 계층구조에 의한 객관적·양적·상대적 신관계에서 신뢰의 관계, 인격적 관계, 나-너의 주체적 관계로의 성서의 메시지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차원의 것으로, 양적 관계가 질적 관계로 전화된 것에 있음을 밝혔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어느 정도가 아니라, 전적이냐 아니냐의 차원인 질적인 것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신의 요구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수용하느냐가 아니라 신의 의지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절대적 명령이라는 것이다.

루터가 수도원 제도나 가톨릭 윤리를 비판한 것은 성직자와 평신도에게 이중의 도덕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단식, 복종, 겸손, 독신 등 엄격한 규칙은 수도사들에게만 한정함으로써 존재론적으로 높은 지위를 부여한 것에 반대하면서 신적인 명령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인 전체에게 절대적 명령에 복종하게 하여 가톨릭 체제를 전복하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의 직접 소유에 의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제와 같은 직위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만인사제설은 평신도들에게도 성직자와 같은 교회 안에서의 권한이 부여되는 만큼 책임도 부여된다고 할 것이다. 즉 교회 안의 수동적 위치에서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능동적 역할이 부여되고, 성령 안에 친교가 가능하게 되는 한편 평신도들은 헌신과 봉사, 형제애 등을 요구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평신도에게도 제자도가 요구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공동체가 갖는 기능에서 성례전적 요소에 더하여 교육의 기능이 더욱 강조됐다고 하겠다. 물론 한국교회는 유럽의 교회들과는 성격이 다른 미국의 종파주의적인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평신도들에 대한 교육이 남다른 점이 많았다고 할 것이다. 이호빈 목사는 일찍이 오늘날 일부 대형교회에서 유행하는 평신도 제자훈련을 강조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오늘날보다 더 보수적이었을 해방 직후의 한국교회 상황에서 목회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평신도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짐작하면서 이호빈 목사의 한국교회에 대한 공헌이 좀 더 비중 있게 다루어졌으면 한다.

2. 우원의 평신도신학의 제도교회와의 상호침투성

▲ 학술세미나 마지막 순서로 종합토론을 하고 있다. ⓒ안창도

몰트만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 로마가톨릭이 제국 교회화되면서 소종파교회들이 등장하였다고 하였다. 이 개혁적인 소종파교회는 진정한 교회의 회복을 원했으며 황제와 제국에 동화된 대교회의 세속적 형태를 배격했다. 개혁적인 소종파교회들은 초대교회의 황금기를 찬양했으며 교회의 국가화에 항거했다. 이 집단에서는 은사적인 성령의 경험을 통한 예수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철저한 제자직 윤리 속에서 생활화되었으며 이와 같이 대교회와 소종파교회의 갈등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는 역사발전을 고려할 때 은자들과 수도자들, 방랑하는 금욕주의자, 수도원공동체, 그리고 평신도형제단은 대교회의 맥락 안에서 보면 혁명적인 집단으로 간주되었다고 하였다.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세상에 개방된 교회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하나의 사회 종교로 변모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들은 대규모의 교회 이외에 다른 어떤 대중 안에서의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들이 대규모의 교회들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세상과의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대규모의 교회들과 엄격한 예수 추종의 집단들은 공동체의 원리가 실현되어 질 때까지 일종의 이중작전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 채로 남는다고 했다.

이러한 몰트만의 이중작전 개념을 이미 이호빈 목사는 해방 직후부터 간파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으니 그의 선지자적 교회개혁운동의 가치가 오늘날 더 값지다고 할 것이다. 즉 김흡영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우원의 평신도 신학은 교회 갱신적 평신도 운동으로서 타율적인 교권 종속적 평신도 운동과 반교권적인 평신도 운동의 사이에 위치한 바람직한 신율적(神律的) 평신도 신학으로 평가하는 것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3. 우원의 평신도 리더십을 통해 본 제자도

발제자는 우원의 평신도 리더십의 중심 요소를 개방적 카리스마, 개혁 지향적 동기부여, 개별적 배려, 영적(靈的), 지적(知的) 자극으로 보았다. 또한 우원의 ‘예수중심적’ 리더십을 설명하면서 예수 중심의 리더십은 위로부터 시작되는 리더십으로, 원시적(遠視的)이고 거시적(巨視的)인 일들에 대해서는 개념과 방향성이 명확하지만, 근시적(近視的)이고 미시적(微視的)인 것에 대해서는 포괄적이고 불확실한 측면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원의 삶의 태도에서 종종 나타나는 유보성(reservation)과 불확실성은 이런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나도 예수 중심의 리더십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같은 인격적 요소에 근거한다고 본다. 우원의 유보성과 불확실성도 겸손과 온유, 인내와 선함 등의 인격적 요소들이 사회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에는 우유부단하고 유약해 보이는 태도일지라도 그것이 기독교적 인품에 기인한 것으로 결국 조직 안에 평화를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회정의를 외치다가 종종 겸손과 온유함(사랑)을 잃어버리는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업에서나 교회에서 업무중심의 리더십보다 관계중심의 리더십을 강조하는데 우원의 리더십이 이에 가깝다고 본다.

4. 우원의 평신도신학의 지평 확대

마지막으로 평신도리더십개발에 대한 예로 남미 평신도기초공동체를 소개하고 더불어 하남YMCA에서 실험하고 있는 소모임에 대한 보고를 통해 우원의 평신도 신학의 지평을 확대하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앞서 인용한 몰트만은, 같은 글에서 교회의 개혁을 위로부터의 개혁인 목회의 전문화, 다양화 작업 등과 아래로부터의 개혁인 기초공동체, 공동체 작업 등으로 나누면서 진정한 교회개혁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아래부터의 교회개혁 모델은 그 중심이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기초공동체를 삼았다.

이들 남미의 수많은 기초공동체들은 때에 따라 성직자의 도움을 받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서민들 가운데서, 소수는 중산층에게서 발견되며 상류층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공동적으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며, 공동기도와 상호협력으로써 성례전도 이 공동체 안에서 시행되었다고 하였다. 이 기초공동체는 오순절운동에 의해서 그리고 민중들 사이에 있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운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듯 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초공동체는 교회와 사회갱신을 위해 예언자적 누룩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이들 기초공동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인의 친교로의 자발적인 구성원들의 모임
2. 구체적인 과제에 대한 상호적인 우정과 공동의 헌신 가운데 눈에 보이는 친교를 누릴 수있다.
3. 각개인의 창조적 능력의 개발과 특권의 포기
4. 영적 삶과 친교의 삶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의 자율성
5. 복음화의 영역에서이든 착취 받고 억압된 자들의 해방의 영역에서이든 사회 안에서의 특수한 기독교적 임무들에 대한 공동적 집중
6.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단순한 그리스도 중심주의로, 신학적으로는 새로운 기독교적 실천에의 반성에로 돌아감.

5. 하남YMCA의 소모임 활동과 평신도지도력 개발

남미의 기초공동체와 비슷한 유형으로는 현재 한국기독교에선 셀교회 모델이 있다. 셀교회와 기초공동체와의 차이는 셀교회가 더욱 목회자 1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목회자 1인의 영적 지도하에 셀그룹을 운영하기 힘든 YMCA에서는 회원 중심의 클럽을 활성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Y클럽은 회원들이 자유롭게 결합하여 조직하고 자율적으로 운영케 하였다.

클럽의 리더들이 클럽의 성격에 부합되는 분과위원회에 위원으로 활동함으로써 클럽의 활동을 지원하고 위원회로 통합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 분과위원장이 되면 당연직 이사가 되도록 하였고, 또 클럽의 리더 중에도 탁월한 리더십을 보이는 사람들은 선출직 이사로 세움으로써 YMCA 전체의 리더들이 지역사회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지도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이러한 Y클럽들은 교회와의 협력 속에서 남미의 기초공동체와 같이 생활공동체, 지역사회 소공동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Y클럽의 소모임은 하향식 통제와 상향식 민주적 리더십 개발이 적당히 배합되도록 하였다. 소모임의 운영에서 회장 등은 자율적으로 선출하게 하되, 소모임의 운영방법과 교재 등을 개발하여 보급하고 특히 리더의 교육을 강화하고자 한다.

하남YMCA의 기독교고전읽기반의 예를 들면 클럽장이랄 수 있는 본인이 전후반 도입부를 맡아서 사회를 보고 실제 독서토론에 들어가서는 매주 순번제로 한 번씩 돌아가면서 진행을 맡고 있다. 토론에 들어가기 전인 저녁 8시를 전후해서 찬양을 3~4곡을 같이 한다. 다행히 참가자 중에 교회전도사님이 기타반주를 해주어서 아주 은혜 가운데 노래를 하고 있다. 찬양 시간이 끝나고 참석자가 대강 모이면 토론을 진행할 그 날의 사회자에게 바턴을 넘긴다. 그러면 사회를 맡은 사회자는 묵상을 잠시 하고 대표기도를 사회자 본인이 하거나 다른 이에게 맡기기도 한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자기가 읽어온 부분에 대한 느낌과 일주일 간의 영적체험을 담담히 발표하게 한다. 이에 대하여 참가자들이 반응을 보이면 역동적인 친교가 이루어진다. 자기가 읽고 느낀 점을 주로 이야기하기에 논쟁으로 번질 위험은 별로 없으며 혹시 그럴 때면 현장에서 지적하지 않고 슬쩍 화제를 돌리고 나서 모임이 끝날 때쯤 진행 방식에 대하여 다시 환기시킨다.

자기의 주장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고, 자기 의견을 부담 없이 마음껏 이야기하라. 그럼 듣는 사람이 알아서 소화할 것이다. 이러한 소모임에선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남의 이야기에서 핵심을 파악하거나 언어에 담겨있는 정서에까지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이로써 남의 말에 대한 수용력이 늘어나게 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모임이 치유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모임 초기에는 구성원들이 삶의 고통을 자주 토로하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2개월이 지난 요즘 들어와서는 동일인물에게서 삶의 행복과 감사의 말을 종종 듣게 되었다. 이것은 소모임이 집단상담의 기능을 은연중에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각개인의 소외와 고독, 무기력증이 소모임을 통해 치유되고 있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목회자야말로 제자도를 먼저 익혀서 실천해야 하는 자요, 섬김의 리더십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자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셀교회의 셀그룹 리더 양육 방법은 평신도지도력 개발에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셀교회들이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에서 평신도지도력 개발에 한계가 있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브라질 기초공동체의 민주적 운영이 남미 가톨릭의 평신도사도직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듯이 셀그룹에서 양육된 지도력이 장로임기제 등을 통해 교회운영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주었으면 한다.

이로써 지금의 셀교회의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직이 교회의 계층체제와 대립되는 현상을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호빈 목사의 교회개혁을 위한 평신도지도자 육성과도 상통하는 것이니 평신도지도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도 현재의 위계질서적인 교회체제의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사회의 민주화가 날로 확산되고 깊이를 더해가는 오늘날에는 민주적인 교회제도의 도입이야말로 평신도지도력 개발의 관건임은 이미 발제자가 글을 통해 주장한 바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보수주의의 아성으로 비치는 것은 교회가 아직도 권위주의적인 계층체제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원의 예수주의란 오늘날 유행하는 제자훈련의 핵심과제인 제자도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주의가 신학교의 지식중심, 학문중심 지적 풍토에 의해 성령의 살아 움직이는 활동이 구속되거나 축소되어선 안 될 것이다. 물론 성령이야말로 신학자들에게 진리에 접근케 하는 더없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평신도들의 성령 체험을 신비주의로 차단하는 이성주의나 객관주의가 지배하는 신학대학의 학문적 풍토 속에서 과연 온전한 예수주의가 꽃필 수 있을지. 우원사상연구소를 비롯하여 평신도신학에 관심을 갖는 신학자들은 좀 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차원에서 평신도운동의 현장을 고찰하고 외국의 사례를 발굴하여 한국적 현실에 접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더불어 평신도들이 교회운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평신도대학’같은 강좌를 열어 목회자와 평신도지도자들이 함께 새로운 교회모델을 모색하는 집단학습의 장을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의 강남대학교 평신도신학이 엘리트 평신도리더십 개발에 강조점을 두었다고 보고 좀 더 민중적이고 공동체적인 평신도리더십 개발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고대해 본다.

안창도 / 하남YMCA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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