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부활주일이었다. 오전 예배를 마친 뒤 삶은 계란과 약간의 선물을 들고 교회 청년들과 함께 서산동(전남 목포시 소재)으로 향했다. 서산동은 온금동과 함께 목포의 대표적인 달동네다. 서산동 보리마당에 자리를 잡은 뒤, 찬양을 힘차게 불러 지역주민들에게 우리가 왔음을 신고했다.

▲ 서산동 전경. 사진 아래 왼쪽에 교회의 종탑과 예배당이 보인다. ⓒ김정민

그러나 찬양 소리를 듣고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꼬마들이었다. 대여섯 명 정도의 청소년들은 우리 팀과 일정 거리를 둔 채 바깥쪽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뿐 쉽사리 앞으로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라고는 할머니 몇 분, 젊은 아기 엄마 두 분이 호기심으로 빤히 쳐다보는 정도.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퀴즈대회도 하고 노래자랑도 시키면서 상품으로 학용품과 삶은 계란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진행 중에 나는 아이들에게 "교회 다니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 했더니 절반 가량의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어느 교회에 다니지요?" 하는 물음에 의외로 모두 멀리 시내에 있는 큰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동네에도 가까운 교회가 있을 텐데 멀리 있는 큰 교회를 다니다니….' 의아해 하는 나에게 아이들이 말해주었다. "(시내 큰 교회의) 교회 버스가 우리 동네까지 와요."

우리나라의 인구 대비 교회 수는 세계적이다. 목포시에만도 400개의 교회가 있으니(목포시 전화부에서 확인) 인구 600명 당 교회가 하나씩 있는 셈이다. 온금동, 서산동은 인구가 7,000명 가량 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10여 개의 교회가 있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 교회라고는 세 개(한빛교회, 성광교회, 목포선교교회) 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당지역은 인구가 55,000명인데 교회 수는 200개 가까이 몰려 있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교회도 슈퍼마켓이나 일반 업소처럼 가난한 동네는 들어가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난지도. 지금은 월드컵공원으로 탈바꿈했지만 십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시민들의 쓰레기 매립장이었다. 그 당시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 6000명 가량의 주민들이 쓰레기 더미를 헤치면서 고물을 주워다 파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몇 번 난지도를 들를 일이 있었던 나는, 어느 주일 일부러 난지도에 있는 한 천막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려본 적이 있었다.

신도 수가 20명 정도의 초라한 천막교회이기는 해도 일반교회에서 볼 수 있는 장의자와 피아노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피아노 반주자가 없다. 허긴, 쓰레기 더미를 헤치며 사는 동네에서 피아노 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 다음 주일에는 강남구 한 유명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바닥에 깔린 진홍 카펫, 화려한 오케스트라 연주, 옷차림과 표정이 너무나 세련된 신도들. 일주일 전의 난지도 교회와 극적인 대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익이 있는 곳에 자본이 따라가는 것이 자본의 생리다. 따라서 수익도 발생하지 않을 빈민지역에 백화점이나 가게가 들어올 리가 없다. 이처럼 빈민지역에서 발생하는 시장의 공백을 어느 수준까지 메워야 할 책임이 정부와 자치단체에게 있다. 그것이 사회정의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는 '이익이 있는 곳에 투자를'이지만 정부 논리는 '욕구가 있는 곳에 지원을' 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빈민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존욕구(식·의·주와 교육 및 보건)는 정부나 자치단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합의이다. 그러나 어려운 사람들의 욕구는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고, 그에 적합한 지원도 절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공공의 지원은 생색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시장경제는 그 생리상 빈민에게 자비를 베푸는데 인색할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정부나 자치단체마저도 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면 어찌되겠는가.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조차도 우리의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갇힌 자들과 늘 함께 하셨는데 오늘 날의 교회는 부유하고, 교육 잘 받고 유복한 자들과 더 가까이 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있을까.

대형교회의 욕심

▲ 서산동 주택가. 이 가파른 골목을 주민들은 아프고 지친 몸으로 오르내려야 한다. ⓒ김정민

얼마 전, 온금동, 서산동 지역을 들를 일이 있었다. 마침 OO교회 앞을 지나려다 예배당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에서 차를 교회 앞에 멈추었다. 텅 빈 예배당에 들어가 잠깐 기도드린 뒤 막 나오려는데 예배당으로 들어오시는 목사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목사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대화 중에 나는 2년 전 부활주일의 기억을 떠올리며 목사님께 여쭈어 보았다.

"왜 동네 어린이들이 가까운 교회를 잘 다니지 않는 걸까요?" "(시내 대형교회의) 교회 버스가 온금동, 서산동까지 들어오는데다가 큰 교회에서는 아이들에게 학용품이며 과자를 선물로 자주 안겨주는데 비해 동네 교회는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목사님의 대답이다.

교회도 이미 자본주의의 물이 들어버린 것일까. 대형교회의 버스가 시내를 종횡으로 움직이면서 원근 구별 없이 무차별적으로 교인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 모으고, 또 이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선물 공세를 벌인다. 이러니 가난한 동네교회가 무슨 재주로 버틸 수 있겠는가. 셔틀버스를 운행하며 각종 경품과 세일로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백화점의 행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지 않는가.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백화점에 휘둘려 동네 영세상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냉혹하게도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교회에도 존재하는 슬픈 현실이다.

그렇다면 큰 교회가 생활고에 허덕이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상처받은 이웃들의 형편을 동네의 작은 교회보다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돌보아 줄 수 있을까. 오히려 빈민지역의 동네교회가 지역주민들을 더욱 가까이에서 돌볼 수 있도록 큰 교회는 가난한 동네 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목사님의 배웅을 뒤로 하면서 예배당을 나서는 마음이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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